◇과수 현장의 최전선에서 마주한 기후 위기
충남 예산군에 위치한 덕현농원의 권영현 대표는 국내 프리미엄 사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이끌어온 인물이다. 과거 아시아 최초로 뉴질랜드 품종인 ‘엔비사과’를 지역에 안착시키며 명품 사과 주산지의 기반을 닦았다. 수십 년간 사과와 함께 살아온 그이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농장 현장에서 체감하는 기후변화의 속도는 과거의 경험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급격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온 상승은 사과의 생육 리듬을 흐트러뜨렸고, 품질 유지에 비상등을 켜게 했다. 과거의 성공 공식에 안주할 수 없음을 직감한 권 대표는 과원의 생존을 위한 체질 개선을 선택했다. 위기를 회피하지 않고 현장의 데이터와 현실을 냉철하게 짚어보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가는 중이다.
◇블랙사파이어 포도 재배의 현실적 교훈
변화의 과정이 늘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농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소득 작목으로 각광받았던 ‘블랙사파이어 포도’ 재배는 권 대표에게도 큰 도전이자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전국 수많은 농가와 마찬가지로 덕현농원 역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며 포도 재배에 뛰어들었으나, 국내의 기후 여건과 품종 특성이 맞지 않아 뚜렷한 한계를 마주했다.
권 대표는 “블랙사파이어 포도 관련 단체장까지 맡으며 최선을 다했지만, 우리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농가들이 기후 장벽을 넘지 못하고 실패를 겪었다”며, “농업은 낭만만으로 버틸 수 없고, 현실의 한계를 인정할 때는 과감하게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시행착오를 겪은 후 그는 미련 없이 포도 재배를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본래의 주력 분야인 사과 중심의 영농 체제로 완전히 선회했다. 실패를 감추기보다 이를 객관적인 데이터와 교훈 삼아 농장의 구조를 재편한 과정은, 변화하는 농업 환경에서 농민이 가져야 할 현실적인 태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기후 적응형 신품종 도입과 내실 다지기
포도 재배를 정리한 덕현농원은 현재 기존 노지 사과 재배지를 대폭 조정하고, 기후변화 대응력을 높인 차세대 품종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사과 생육 적온보다 높아진 여름철 고온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고온에서도 뛰어난 착색과 사과 본연의 식감을 살릴 수 있는 국내 육성 품종 및 독보적인 식감을 자랑하는 ‘감홍’ 사과 등을 단계적으로 식재하며 과원을 새롭게 정비하고 있다.
현재 현장에서는 조급한 홍보나 무리한 노출보다는 철저한 적응 시험과 내실 다지기에 집중하고 있다. 품종 등록 및 상용화 절차가 마무리되고 안정적인 수확이 본궤도에 오르는 시점이 되면, 덕현농원의 새로운 사과들은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평가받게 될 전망이다.
◇소비자와 호흡하는 열린 농장으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다
수십 년간 사과를 키우며 유통 구조의 변화를 지켜봐 온 권영현 대표의 시선은 이제 농장의 외형적 확장보다 내실과 사람을 향하고 있다. 그동안 고품질의 사과를 생산해 유통망에 공급하는 데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농장 자체가 소비자와 직접 소통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권 대표는 “앞으로는 덕현농원의 하우스와 과원을 찾는 소비자들이 농장에서 친근감을 느끼고, 사과가 자라는 과정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 가꾸고 싶다”며, “나이가 들어가면서 농장을 찾는 이들과 진솔하게 교감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농장을 만드는 것이 남은 과제”라고 전했다.
초고령화와 기후위기라는 복합적인 현실 속에서도 권영현 대표는 농장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흙을 지키고 있다. 냉정한 현실 진단과 묵직한 실행력으로 과수 농업의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그의 일상은, 오늘날 한국 농업이 마주한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덕현농원 ◀클릭
이 기사는 본지 공식 블로그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