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명을 거부하는 폭력적 아름다움과 캔버스의 도발
세상에는 설명을 필요로 하는 그림이 있고, 설명을 아예 지워버리는 그림이 있다. 최예태 화백의 회화는 후자에 속한다. 붉은 산, 청록의 거대한 봉우리, 캔버스를 가득 메우는 노을과 태양의 난무 앞에 서면, 미술사적 계보나 이성적인 조형 분석 같은 잣대는 무력해진다. 눈을 찔러오는 듯한 강렬한 원색과 칼로 베어낸 듯 단정한 면 분할은 관람자를 향해 무언가를 친절하게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순수한 재현이 아니라, 자연을 압도하고 화면 위에서 새롭게 창조하려는 인간의 거대한 에너지 선언이다.
구순(九旬)을 코앞에 둔 원로 화가. 그는 백발이 성성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색채’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소년 같은 독기와 번뜩이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프랑스 파리와 캐나다 몬트리올을 거쳐 한국적 신구상(新具象)의 정점에 서기까지, 그가 평생을 바쳐 캔버스 위에 쏟아부은 것은 고독과 정면으로 맞선 한 인간의 생애 그 자체였다.
◇자연을 해체하고 조립하는 거장의 눈
사람들은 흔히 ‘산’을 그리려면 그윽한 수묵의 향취나 부드럽게 감싸 안는 안개를 떠올린다. 그러나 최예태의 산에는 안개가 없다. 가감 없는 원색의 충돌과 단단하게 조율된 기하학적 면 분할이 있을 뿐이다.
그가 북한산이나 도봉산, 혹은 알래스카의 만년설을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은 소박한 경외를 넘어선 ‘격정’에 가깝다. 자연의 겉모습을 곱게 베끼는 일은 애초에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는 자연을 철저히 해체한 뒤, 오직 회화의 순수한 언어로 다시 조립해 낸다.
“자세히 보면 세상의 자연은 인간의 인체와 참 많이 닮아 있다. 산맥의 굴곡도, 대지의 숨결도 결국 생명체의 살과 뼈다. 나는 자연을 그대로 옮기는 일에 흥미가 없다. 신이 창조해낸 그 거대한 조형물의 뼈대를 내 식대로 해석하고, 내 기호의 색으로 옷을 입히는 것,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작업이다”
그의 화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붉은 산의 환타지’ 연작은 알래스카 여행 중 목격한 일몰에서 비롯됐다. 만년설 위에 얹힌 붉은 낙조의 충격. 일반적인 눈으로는 그냥 지나쳤을 그 찰나의 시각적 폭력을 그는 온전히 품어 안았다. 돌아오자마자 캔버스를 난타하듯 에스키스를 뜨고 붉은 산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대상을 향한 소극적인 집착이 아니라, 대상이 내 안에서 소화되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평론가들은 종종 그의 작업을 폴 세잔과 비교하곤 한다. 세잔 역시 생 빅투아르산을 평생의 화두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 화백은 담담하게 선을 긋는다. “세잔도 산을 많이 그려왔고 나 역시 그렇지만, 세잔은 세잔이고 최예태는 최예태”라는 그의 목소리에는 반세기 넘게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 다져온 거장의 자부심이 배어난다.
◇타협 없는 ‘신구상’의 고독과 정체성
동시대 미술계는 끊임없이 변모한다. 설치, 미디어아트, 개념 미술이 미술관의 주류를 점유한 지 오래고, 젊은 작가들은 시류에 발맞추어 매체를 확장하며 평면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러나 최예태 화백은 요지부동이다. 그는 유화와 합성 재료를 오가며 오직 평면과 캔버스 위에서 색채와 선의 정수를 다듬는 일에만 모든 것을 걸어왔다. 그것은 타협의 거부이자, 스스로에 대한 엄정한 검열이다.
“남들이 어떻게 하든 나는 내 기호를 끌고 나갈 뿐이다. 유행을 좇아 남들을 따라가기만 해서는 내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결국 예술이란 ‘내가 가장 미칠 수 있는 것’을 하는 거다. 평론가들이 내게 신구상의 대표 작가라 부르지만, 내 목표는 타이틀이 아니다. 나는 그저 어제보다 진일보한 내 그림을 그리고 싶을 뿐이다”
프랑스 파리와 캐나다 몬트리올 유학 시절, 그는 이미 이방인의 눈으로 한국적 정체성의 본질을 예리하게 통찰했다. 청자와 백자의 유려한 곡선, 오방색의 원초적 대비. 외국인들이 그의 누드화나 정물화 속에서 본능적으로 ‘한국의 냄새’를 맡았던 이유는, 그가 전통을 억지로 흉내 냈기 때문이 아니라 뼛속까지 한국인인 그의 시선이 순수한 구상의 형태로 걸러져 나왔기 때문이다. 2001년 파리 평론가 로제 부이요가 그의 화면에서 ‘영혼의 평화와 은밀한 초록빛 신비’를 읽어낸 것은 치열한 섭리와도 같았다.
◇거장의 찬란한 명예, 그 이면에 가려진 예술가의 진심
지난해는 최 화백에게 더없이 찬란한 한 해였다. 대전시립미술관의 이동훈미술상 본상 수상에 이어, 프랑스 셍 망데의 국립프랑스예술가협회 가을 전람회(ANAF)에서 외국인 최초 초대작가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500명이 넘는 응모자 속에서 선발된 그의 작품 10점은 현지 포스터와 거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세상의 찬사를 가볍게 털어내며 제 길을 걸어갈 법도 하지만, 그는 백발의 연륜만큼이나 차분한 여유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사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마치 왕이 된 기분이었다”며 소탈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그 영예는 결코 하루아침에 주어지지 않은 값진 왕좌였다.
그 화려한 조명의 뒤편에는 여전히 배고픈 후배 예술가들을 향한 씁쓸하고도 애틋한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 아트페어의 허울 좋은 호황 뒤에 가려진 대다수 작가들의 생활고, 생계를 위해 화폭을 떠나 다른 노동을 해야 하는 현실을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잠시 가라앉았다.
“대표적인 화가들조차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면 그 사회의 문화는 부끄러운 거다. 좋은 화가들이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밑거름을 대주어야 한다. 후배들에게 감히 말하건대, 현실이 지독하게 차가워도 화가는 결국 캔버스 앞에서 죽는 심정으로 버텨야 한다”
◇1000호를 향한 질주, 영원한 ‘울림’을 향하여
현재 고향인 군산시에서는 그의 이름을 건 ‘최예태 미술관’을 건립하기 위한 시민들의 서명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성신여대에 기증된 52점의 작품이 학생들의 일상에 스며들듯, 새만금을 찾는 수많은 이들이 거장의 원색적 기운을 마주할 날이 머지않았다.
그러나 최 화백에게 미술관이라는 이름의 ‘명예’는 완성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다가오는 구순의 나이가 무색하게 그의 다부진 각오는 청년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 대작을 더 많이 할 생각이다. 1000호짜리 거대한 화면 앞에 서면 심장이 뛴다. 그 방대한 대작과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고 나면, 100호의 캔버스는 또 다른 결의 깊은 밀도와 집중을 요구하는 정교한 세계로 다가오곤 한다. 모네 전시장에 사람들이 줄을 서듯, 나 역시 죽는 그 날까지 사람들의 가슴을 때리는 그림을 그리다 갈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뒷모습에서 묘한 생명력이 요동쳤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뻔한 진리가 아니라, ‘아름다움에 완전히 미쳐버린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영원한 청춘’의 뒷모습이었다. 최예태의 붉은 산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차가운 일상 속에서 가장 뜨겁고 찬란한 ‘울림’으로 타오르고 있다.
이 기사는 본지 공식 블로그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